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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구조기술사는...

섬과 섬을, 섬과 땅을 이어
지도를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VOL.3 202302] KPSEA PEOPLE_공로상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디엠엔지니어링 고문 장승필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023.02.22

374회

공로상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디엠엔지니어링 고문 장승필

 

 

간단한 이력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1943년에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 세대들은 초등학교(초등학교) 2학년 올라가자 바로 625동란에 휩쓸려 몹시 힘든 피난살이를 지냈고, 고등학교 3학년에 419혁명과 대학교 1학년 때 박정희 소장의 군사 쿠데타를 경험한,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젊은 시절은 보낸 세대입니다. 저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토목공학과에 입학하고 1965년에 공학학사로 졸업을 한 후 우리 사이에는 바보들만 지원한다는 ROTC 소위로 1967년에 군 복무를 마쳤습니다. 어릴 때부터 스위스 아이거 북벽 등반을 꿈꾸었었기 때문에 1968년 아이거 등반도 할겸 서독 남부에 있는 Stuttgart 공과 대학교 건설공학부 구조공학과에 3학년 과정으로 수학을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1971년에 Diplom Ingenieur(MS degree 해당)를, 그리고 1976년 1월에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1976년 7월부터 서울대학교 조교수로 사회생활을 시작한지 33년 만인 2008년 8월까지 서울대학교 토목공학과에서 교수 생활을 했습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대한토목학회 학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2001~2002년 회장), 그 과정에서 자연히 각 전공 분야에 대한 학술 활동에 중심이 되어야 하는 전문학술단체의 설립에 관여하게 되어 1986년 한국 강구조학회 창립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그 이후 1996년 한국지진공학회 설립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되었습니다(초대 회장). 국외 학술활동은 1976년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국제 교량 및 구조공학회(IABSE, 스위스 츄리히에 본부)에 회원으로 시작하여 2005년부터 8년 동안 부회장으로서 활동하면서 한국 교량기술의 해외 홍보에 많은 힘을 쏟았었습니다. 1997년부터 9년간 과학재단 한국지진공학연구센터장을 지낸 것이 인연이되어 1997년부터 1999년 2년간 세계원자력구조역학학회(IASMiRT)회장 직을 맡아 국내 원자력토목의 국외 홍보에 힘썼습니다. 2009년 말부터 시작된 도로공사의 VC10 초장대교량연구사업단 총괄자문위원(Program Director)을 2015년에 마친후, 2016년부터 지금까지 DM 엔지니어링 기술고문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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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사회기반시설물 안전의 날에 공로상을 수상하셨는데 소감은?

저에게 구조기술사회에서 공로상 수상자로 추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독일 교수들처럼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현장에서 충분한 경험을 갖추고 40대가 되어서야 교수직에 도전하고 교수가 된 후에도 자기 개인 설계사무소를 운영할 수 있는 경우와 달리, 우리나라 대학에서는 박사학위 후 바로 전임교수나 조교수로 대학 강의를 시작하기 때문에 대학교수가 실무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어서 저에게 현장 기술자들이 주는 상은 무척 부담스러웠던 겁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1976년 국내 기술 현장의 상황은 지금과는 몹시 달라서 제가 귀국해 보니 우리나라에 세워졌던 많은 교량이 노후화되거나 훼손되어 있어서, 정부에서는 전농동에 있었던 건설시험소에 전국 교량 안전을 검사하는 임무를 맡기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strain gage를 다룰 수 있는 기술자가 서울대학교의 신영기 교수와 한양대학교의 장동일 교수 등 매우 적은 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전국의 산재되어 있는 오래된 교량들의 안전진단은 주로 언급한 두분의 교수님들과 대학원생들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귀국한 이후에는 신영기 교수님께서 저에게 교량안전진단 일을 맡기셔서 저와 구조연구실 대학원생들은 남해대교의 안전진단을 비롯하여 양수리 교량 등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교량 안전진단 기술을 습득하면서 안전진단 지침을 준비했습니다. 이렇게 대학 연구실로부터 시작한 우리나라 교량구조 안전진단의 역사가 쌓여 1994년에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계기로 1995년에 설립된 시설안전기술공단 연구사업의 토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를 억지로 가져다 대면서, 저는 구조기술사회에서 신영기, 장동일, 황학주 교수님과 그 연구실 제자들, 또 저와 함께 전국을 돌면서 전기선을 끌어오고, 실험 교량 위를 통행하는 차들을 통제하던 여러 후배들에게 공동으로 주는 상을 제가 대표로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살아오면서 구조물안전과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지난 40년간 살아오면서 교량의 안전과 관련하여 특히 생각나는 사건은 1991년 5월에 발생했던 행주대교 붕괴사고, 1992년 8월 일어난 팔당대교 붕괴사고 및 1994년 10월 새벽 서울시민을 놀라게 만든 성수대교 붕괴사고입니다. 저는 부산에 토목학회 행사차 부산에 내려갔다가 TV 저녁 뉴스를 통해 그날 오전 김포공항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행주대교가 붕괴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토목학회 행주대교 붕괴원인 조사 위원회 팀장 자격으로 서울로 되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행주대교는 두 팀이 따로 붕괴원인 조사를 했는데 저의 팀은 사고 현장에 노출된 프리케스트로 제작된 콘크리트 박스 단면을 보고 그만 깜짝 놀랐습니다. 절단된 콘크리트 단면에는 몇 가닥 작은 직경의 철근만 끊어진 채로 남아있었습니다. 만약 강선의 프리스트레스가 충분치 못한 경우에는 일반철근의 전단파괴는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당시 만해도 우리에게는 프리케스트 콘크리트 단면에 전단키를 사용하는 기술이 없었습니다.

이 행주대교 붕괴사고를 계기로 저의 연구실에서는 Bridge Health Monitoring System을 개발하기 시작하여 그후 신행주대교 건설과정에 이 기술을 적용하여 당시 우리 교량 기술자들의 부족한 시공 경험을 성공적으로 보완해 줄 수 있었습니다. 이 신행주대교 건설 이후로 우리나라 교량기술자들은 현재 BHMS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 수준을 갖추고 되었습니다.

행주대교 붕괴사고 이후 바로 그다음 해인 1992년 8월에 팔당대교가 시공 도중 돌풍에 의하여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다행히 그날이 휴일이라 포크레인 작업하던 분만 사고를 당하고 더 큰 인명사고는 없었습니다. 사고가 발생하자마자 대한토목학회에서는 바로 교량사고원인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저도 그 조사위원회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조사위원회 위원 몇 분은 돌풍에 의한 천재지변을 교량사고 원인으로 제시하기도 했었습니다. 사실 팔당댐 아래에 있는 팔당대교는 댐 위에서 아래로 불어대는 상당한 세기의, 그릭 매우 불규칙한 방향으로 부는 바람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조사위원회에서는 좀 더 공학적인 원인 분석이 필요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풍공학 분야가 발달되어 있질 않았기 때문에 변변한 풍동시설을 국내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풍동은 영종대교가 세워진 한참 후 전북대학교 권순덕 교수에 의하여 구비 되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팔당대교 붕괴 원인을 제대로 풍공학을 기반으로 조사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당시에 확인할 수 있었던 붕괴원인으로는 시공을 위하여 세웠던 가교각의 부재 연결이 부실했고 여기에 덧붙여 교각의 안전성(Stability) 검사를 제대로 하질 않아 벌어졌던 사고로 기억이 됩니다. 교각의 안전성 검사는 강구조 강의 시간에 많이 강조되는 사항이지만 오늘까지도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는 매우 의심 갈 때가 많습니다. 특히 건축에서나 사용될 만한 부재들을 교량 가교각에 사용하는 현장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합니다. 지금도 팔당대교의 붕괴사고원인을 지금의 교량 현장 시공기술자들도 상세하게 인지했으면 합니다. 우리나라의 현대 교량역사에 가장 큰 고비는 1994년 10월 21일 새벽 한강에서 일어났던 성수대교 붕괴사고입니다. 제3공화국 시절 우리나라의 지속적인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공으로 1970년 후반에는 경기도 북부에서 생산된 많은 공장제품이 한강 남으로 운송되고, 또한 많은 원료가 한강 남쪽에서 의정부, 포천쪽으로 수송되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한강에 성수대교와 성산대교를 건설하여 이 물류량을 소화하려고 계획하여 이 두 다리를 1979년 말에 완성하여 사용하였다. 이 성수대교 위에는 레미콘트럭 같은 주로 중량이 많이 나가는 차량이 운행되었다. 이 당시 성수대교 북단에는 현병이 지키면서 북한의 테러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량 사고가 나던 당시만 해도 교량의 안전진단은 오직 육안으로만 가능했던 시절이었고, 더군다나 성수대교와 성산대교는 다리를 세운 지 20년이 채 못되어 서울시에서 실시한 정밀안전진단의 대상에서 빠져 있었습니다.

서울시로부터 성수대교 정밀안전진단 용역을 의뢰받은 대한토목학회는 저를 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성수대교 붕괴 원인 조사를 지시했습니다. 저는 바로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그 당시만 해도 교량 붕괴 부재가 있는 지점에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곡예 하듯 파단된 단면에 도달은 했으나 전혀 감이 오지 않아서 다시 강바닥에 박혀있는 트러스 핀 부재의 단면을 찾아 아래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가 몇 분 후에야 비로서 핀 부재로서 역할을 하는 플랜지가18mm 맞대기 용접이 되었어야 하는데 현장에서 확인한 바로는 약 4mm정도의 용접이 가용접 상태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검철 조사과정에서 안 사실이지만 이 부분의 용접은 영등포에 있는 한 철물점에서 시행했는데(이 당시에 교량을 건설하던 시공사가 용접기술이 부족해서 외주를 준 것으로 파악되었음) 이 사람들이 용접을 제대로 하지 않고 5m 짜리 핀 부재를 만든 후에 그 용접 부위 위에 페인트를 칠해놓은 바람에 교량 시공 현장에서는 알 길이 없었던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용접을 담당했던 영등포 철물점은 교량 사고가 날 당시에는 이미 폐업을 한 후 한 참되어서 담당자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성수대교의 붕괴사고는 우리나라 감리제도를 정착시키는 등 교량기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교량의 유지관리를 위한 시설안전관리공단(현 국토안전관리원)이 1995년에 설립되었습니다. 특히 신행주대교에 처음 적용되었던 Bridge Health Monitoring System이 성수대교 재건 당시 본격적으로 적용되어 제1세대 BHMS의 완성되는 시기였습니다.

 

미래 건설엔지니어링의 개선 방향은?

1970년대 대한민국 엔지니어 중 직접 설계하고 시공하는 기술을 가진 엔지니어는 토목분야 엔지니어들이 유일하였다. 그 이외 거의 모든 분야 엔지니어들은 해외 기술자들이 설계한 내용을 응용하는 정도이었고, 그들이 직접 공장을 설계하고 시공하는 기술은 보유하고 있질 못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토목엔지니어들은 비록 일본 시방서를 그대로 모방했을지언정 댐도 설계하고, 교량도 설계·시공할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 들어와서는 서구 유럽을 포함한 외국의 선진 건설 기술을 도입하려 서둘렀다가 1990년대 초반 엄청난 사회적 혼란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부터 시작한 각 대학교 대학원과정의 활성화는 1980년대 후반부터 많은 젊고 유능한 엔지니어들이 대학과 연구소로부터 배출되었고, 이들은 해외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해외 유학파들과 함께 지난 30년 동안 지속적으로 우리나라 건설기술을 발전시켜 지금 우리나라 건설 계를 움직이는 40대/50대/60대 초반 엔지니어들은 이제는 해외에서의 공사들도 낮이 설지 않게 소화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고 확신합니다. 예전 세대(60대 후반/70대/80대)들이 선진국 설계 및 공사시방서를 번역하는 정도였다면, 지금의 엔지니어들은 그 수준을 넘어 직접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적용하는 단계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부터 우리가 느낀 바대로 컴퓨터와 정보·통신 기술의 개발로

모든 산업계는 초 극단의 자동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2020년대에 들어와서는 모든 분야의 융·복합 과정이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어 산업간의 경계가 생각보다 훨씬더 빠르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리 건설산업분야도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우리는 아직도 건축과 토목을 나누고, 토목 중에서도 구조와 토질, 구조와 수리 분야에 벽을 쌓고, 또한 순수 토목과 교통, 환경 도시를 갈라치고 있습니다.

우리 구조기술사분들은 미래 어떤 일들을 하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땅속과 물속에 도시를 만들고, 교통시스템도 땅속과 물속에도 만들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대량으로 처리할 수 있는 하수처리장과 같은 공기처리장 구조물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업을 건축분야, 환경분야, 교통분야, 도시분야, 기계분야, 조선분야, 화공분야 기술자들과 협업해서 추진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수단으로 정보통신기술과 전산기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건설산업은 그렇게 모든 분야를 한 두 해에 걸쳐 습득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지금 40대라면 혹시 모르지만 50대/60대분들이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고 기술을 몸으로 습득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부족합니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억지로 일을 하다보면 건강을 해치고 가정에 불행을 가져옵니다. 따라서 제 생각으로는 지금 우리 건설산업계의 중추역할을 하는 현 건설엔지니어들은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최대한 더 개발하고 활용하여 건설산업발전에 기여하는데 충실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다만, 본인들이 새로운 시대를 직접 끌어갈 수는 없으므로 후배들이 자기들의 세계를 개척할 수 있도록, 그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를 해 주는 것이 선배로서의 해야 할 일이 아닐가 생각해 봅니다.

 

현재를 사는 구조엔지니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2020년부터 앞으로 30년간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사회적 변화가 예상됩니다. 따라서 미래 사회시스템 자체도 급속하게 변해 나갈 터인데 그 과정에서 우리 건설산업계만 아니라 국가 전 산업계를 이끌고 나가는 40~50대 엔지니어들이 많은 정신적,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격을 것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가져봅니다. 이럴 때는 살아남기 위하여 주위에 있는 다른 동료를 서로 힘들게 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인간은 원래 탐욕스러운 면이 태어날 때부터 있고, 또한 이 욕심이 채워지질 않으면 화를 내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으로 멀리서 보면 어리석은 일이긴 한데 현실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발짝만 떨어져서 우리를 살펴보면, 이럴수록 우리는 서로를 따듯하게 아껴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국민들에게 건설산업을 알리는 영웅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만약 우리가 서로 떨어져 각자도생을 꾀한다면 국민들의 관심에서는 멀어질 것이고, 이 틈을 타서 다른 분야 산업에서는 우리를 각개 격파하여 자기들의 하청업자로 만들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기 전공하는 분야가 서로 다르더라도 공공재를 다루는 공통된 경험을 하고 있기에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결코 우리가 서로 남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힘이 드는 환경이 놓일수록 우리 모두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 따듯한 마음으로 힘을 합쳐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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